여행이 풍경이 아닌 삶을 마주하는 순간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우리는 흔히 유명한 관광지, 이미 검증된 장소를 떠올린다. 사진이 잘 나오고, 검색하면 정보가 넘쳐나는 곳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여행이 조금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분명 아름다웠지만, 오래 남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사라져가는 마을’이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소멸 위기에 놓인 지역들. 관광객은 거의 없고, 편의시설도 부족한 곳. 누군가는 굳이 갈 이유가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오히려 여행의 본질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1.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풍경들
사라져가는 마을의 풍경은 한눈에 화려하지 않다. 처음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조용함’이다. 조용하다는 표현조차 부족할 정도로, 소리가 없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고, 사람의 목소리도 드물다. 바람이 전봇대를 스치는 소리, 낡은 간판이 흔들리는 소리 같은 것들이 공간을 채운다.
일본 도쿠시마현의 나가로 마을은 이런 분위기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인구 감소로 실제 주민 수보다 마을 곳곳에 놓인 ‘인형’이 더 눈에 띄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버스 정류장, 폐교된 학교, 논두렁에 앉아 있는 인형들은 처음엔 기이하지만, 곧 사라진 사람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마을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삶의 밀도는 이미 크게 옅어져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풍경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강원도 정선·태백 인근의 산촌 마을에 들어서면, 빈집과 폐가가 낯설지 않다. 하지만 마당에 남아 있는 장독대, 오래된 감나무, 닳아 있는 대문 손잡이는 분명 누군가의 일상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사람은 떠났지만, 삶의 흔적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의 크라코(Craco)가 인상 깊다. 지진과 산사태로 주민들이 떠난 뒤, 마을 전체가 거의 무인 상태로 남아 있다. 관광지로 조금씩 알려지고는 있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여전히 ‘멈춘 시간’에 가깝다. 무너진 집과 비어 있는 골목을 걷다 보면, 이곳이 단순한 명소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2. 여행자가 아닌 ‘방문자’가 되는 경험
사라져가는 마을을 여행하며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내 태도였다. 나는 더 이상 소비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머무는 방문자가 되었다. 사진을 찍기 전에 잠시 멈추게 되고, 소리를 낮추게 된다. 마치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일본 시마네현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는 점심시간에 문을 연 식당이 단 한 곳뿐이었다. 메뉴는 선택지가 없었고, 주인은 “오늘은 이거밖에 없어”라고 말했다. 불편함보다는 이상하게도 안도감이 들었다. 이곳은 여행자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 아니라, 여전히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국 전북의 섬진강 인근 농촌 마을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길을 묻자 마을 어르신은 “여긴 볼 게 없어”라고 말했지만, 그 말에는 이곳이 더 이상 선택받지 못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체념이 담겨 있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순간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이 마을의 현재를 잠시 함께 바라보는 사람이 된 듯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 코르푸 섬의 올드 페리티아(Perithia)가 기억에 남는다. 한때 수백 명이 살았던 이 마을은 지금은 소수의 주민만 남아 있다. 관광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마을은 조용하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곳이 ‘다시 살아나길 바라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3. 사라짐을 기록하는 여행의 의미
사라져가는 마을을 여행하며 가장 많이 떠올린 생각은 ‘기록’이었다. 이곳은 몇 년 후에도 지금과 같을까? 이 골목, 이 집, 이 풍경은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여행 중 찍은 사진들이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어쩌면 마지막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산촌 마을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농촌 지역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젊은 세대는 도시로 떠나고, 마을은 천천히 늙어간다. 이곳을 여행하는 일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기보다, 잊혀가는 시간을 마주하는 일에 가깝다.
이런 여행은 즐겁기만 하지는 않다. 때로는 씁쓸하고, 무겁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여행의 사회적 의미가 생긴다. 사라져가는 마을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일은, 최소한 그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남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마을을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관심은 기록으로 남고, 기록은 기억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이 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 장의 사진이, 새로운 시선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는 마을을 여행한 이후, 나는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이 조금 달라졌다. 유명함보다 이유를, 편리함보다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관광객이 거의 없는 마을에서 보낸 시간은 조용했지만, 분명히 오래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여행이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