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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만 유지된 나만의 임시 습관

by 에옹여행기 2025. 12. 24.

돌아오면 사라졌지만, 분명 나를 바꿨던 시간들

 

여행을 떠나면 이상한 변화가 생긴다.
집에서는 며칠도 유지하지 못하던 습관이,
여행지에서는 아무 노력 없이 반복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같은 카페에 들어가 같은 자리에 앉고,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같은 음식을 주문한다.
그때는 그게 ‘습관’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저 그 하루의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이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 임시 습관들은 놀랄 만큼 빠르게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그 시기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단정하고, 차분했던 것처럼 느껴진다.

이 글은 여행지에서만 유지되었던 나만의 임시 습관에 대한 기록이자,
왜 여행에서는 미세 습관이 쉽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여행지에서만 유지된 나만의 임시 습관
여행지에서만 유지된 나만의 임시 습관

 

1. 매일 같은 카페에 가는 일, 선택을 줄인다는 것

 

여행지에서 가장 먼저 생기는 습관은 종종 아주 사소하다.
“오늘은 어디 가지?” 대신
“어제 갔던 그곳으로 다시 가자”라는 선택.

하루 이틀은 우연이지만,
사흘째부터는 의식적인 반복이 된다.
메뉴판을 오래 보지 않아도 되고,
자리 고민도 하지 않는다.
주문은 점점 빨라지고,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이 반복은 편안함을 만든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하나쯤은 예측 가능한 공간이 필요해진다.
그 역할을 같은 카페가 맡는다.

여행지 예시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작은 개인 카페
관광객보다 동네 단골이 많은 곳.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제주 구좌읍 해안 근처 로스터리 카페
바다를 보러 가기 전, 늘 같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부산 영도 골목의 오래된 다방
메뉴는 많았지만 결국 매일 같은 커피를 주문하게 됐다.

이 습관의 핵심은 ‘카페’가 아니다.
선택의 개수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미세 습관이 유지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행동 자체보다도 ‘결정 피로’에 있다.
여행지에서는 선택지가 줄어들고,
그래서 습관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2. 같은 산책 코스, 하루를 정리하는 리듬

 

여행지에서는 유독 산책을 많이 하게 된다.
특별히 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도 없고,
대단한 목적지도 없다.
그저 숙소 근처를 한 바퀴 도는 일.

처음에는 길을 익히기 위한 산책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된다.
오늘 본 풍경을 떠올리고,
괜히 찍지 않은 사진을 떠올리고,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을 흘려보낸다.

놀라운 점은,
이 산책이 거의 같은 시간대, 같은 루트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이미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행지 예시

교토 카모가와 강변 산책로
아침과 저녁의 분위기가 전혀 달라, 하루에 두 번 같은 길을 걸었다.

강릉 구도심 주택가 골목
관광지에서 벗어난 조용한 동네, 매일 해 질 무렵 같은 코스로 걸었다.

리스본 알파마 지구 언덕길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루트였지만, 점점 속도가 일정해졌다.

이 산책 습관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라졌다.
바쁘고, 피곤하고, 이유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행지에서의 산책은 분명했다.
목적이 없어서 유지된 습관이었다.

미세 습관이 오래 가려면
‘왜 해야 하는지’보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여행은 조용히 알려준다.

 

3. 같은 음식을 먹는 반복, 여행 속에서 생긴 안정감

 

여행지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먹어야 할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음식을 반복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실패하지 않는 선택,
이미 한 번 검증된 메뉴.

처음에는 귀찮아서였고,
그다음에는 익숙해서였고,
마지막에는 그 음식이 하루의 기준점이 됐다.

“이걸 먹었으니 오늘 하루는 괜찮다”라는
묘한 안정감.
여행의 불확실성 속에서
식사는 가장 확실한 루틴이 된다.

여행지 예시

오사카의 작은 라멘집
매일 저녁 같은 시간, 같은 메뉴. 주문할 필요도 없었다.

전주 남부시장 근처 백반집
메뉴는 달랐지만 구성은 늘 비슷했고,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방콕의 로컬 쌀국수 가게
관광객이 거의 없는 곳이라 오히려 부담 없이 반복할 수 있었다.

이 반복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행을 안정시켰다.
매번 새로운 걸 시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 덕분에 다른 감각에 더 여유를 쓸 수 있었다.

여행은 왜 미세 습관을 쉽게 만들까

여행지에서 유지된 임시 습관들은
대부분 아주 작고, 특별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작은 반복들이 모여
여행 중의 나를 더 단정하게 만든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환경이 단순하다

선택지가 적다

실패에 대한 부담이 적다

타인의 시선이 느슨하다

이 네 가지 조건은
미세 습관이 형성되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습관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의지 부족이 아니라 환경 때문이라는 사실을
여행은 너무 쉽게 증명해 버린다.

 

돌아오면 사라지지만, 의미는 남는다

 

여행지에서 만들었던 임시 습관들은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오면 유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는 아니다.

그 경험은 이렇게 질문하게 만든다.
“나는 어떤 환경에서 가장 안정적인 사람인가?”
“선택이 줄어들면, 나는 더 잘 움직이는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반복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인가?”

여행은 습관의 실험실이다.
그 안에서 성공한 미세 습관 하나만 건져도,
여행은 충분히 역할을 다한 셈이다.

다음 여행에서는
굳이 새로운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좋다.
하나의 카페, 하나의 산책길, 하나의 식사.
그 작은 반복이
여행을 더 깊게 만들고,
돌아온 이후의 나를 조금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